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-왜 전쟁 (문단 편집) === 최후의 전투 ===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신왕은 그해 9월 도성 사람들을 모아 서대(西臺)에서 [[활쏘기]]를 익히게 하는 등 전쟁 준비를 그만두지 않았고, 이에 백성들의 불만은 팽배해져만 갔다. 399년 8월, 아신왕이 고구려 공격을 위해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자 지속되는 징집에 지친 백성들이 [[신라]]와 [[왜국]]에 대규모로 귀순하며 북벌이 취소되고 말았다. 백제 왕족으로 추정되는 [[궁월군]]이 무려 120현(縣)의 인구를 들고 [[왜국]]으로 망명해 왔을 정도이다. 고갈되는 병력과 떠나가는 민심을 뒤늦게 알아챈 [[아신왕]]은 별 수 없이 고구려 정벌을 잠시나마 포기하고 [[가야]], [[왜국]]과 힘을 합쳐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[[신라]]부터 처리하기로 결심했다. 이러한 정황을 파악한 [[내물 마립간]]은 [[사신]]을 보내 "왜인이 국경에 가득 차 성과 해자를 부수었습니다. 노객은 백성으로서 대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."라며 [[광개토대왕]]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. 광개토대왕은 내물 마립간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사신에게 고구려군의 계책을 알려준 뒤 돌려보냈다. >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.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. 官軍方至 倭賊退 ▨▨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. 安羅人戍兵. ▨新羅城▨城 倭寇大潰 城▨▨▨盡▨▨▨安羅人戍兵新▨▨▨▨其▨▨▨▨▨▨▨言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辭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▨潰▨▨▨▨ 安羅人戍兵.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▨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▨▨▨▨ 寐錦▨▨僕 勾▨▨▨▨朝貢. >영락 10년 경자년(서기 [[400년]]), (왕이) [[보병]]과 [[기병]]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. [[여주시|남거성]](男居城)을 거쳐 [[서라벌|신라성]]에 이르니,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.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고, 그 뒤를 급히 쫓아가 [[금관국|임나가라]]의 종발성[* 금관가야 지역의 성이다.]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. 이에 안라인수병(安羅人戍兵)하였다.[* 이 '안라인수병'이라는 문구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이다. 안라를 명사로 해석하여 '[[안라국]] 사람 수비병'으로 풀이하기도 하며, 안(安)을 동사로 해석하여 '나인(羅人)을 수비병으로 두었다'고 풀이하기도 한다. 후자의 설을 따를 경우, '라(羅)'로 끝나는 고대 한반도의 국명이 한둘이 아닌지라 나인(羅人)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편이다.] … 신라성(新羅城) ▨성(▨城) … 하였고,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. 성(城)[* 이후의 71자는 글자 훼손으로 인해 판독 불명. 대체로 고구려가 신라와 임나가라 지역의 왜-가야 연합세력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한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.] ▨▨▨ 안라인수병(安羅人戍兵)하였다. 과거 [[신라]]의 [[매금]]은 직접 와서 여쭈지 않았는데, [[광개토대왕|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]]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'''직접 와서 여쭈고 조공하였다.''' >---- >〈[[광개토대왕릉비]]〉 제2~3면[* [[삼국사기]]에는 해당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. 같은 내물 마립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400년(혹은 399년) 고구려 군대가 지원을 한 전쟁에 대한 기록은 없다.] 마침내 400년, [[백제]]는 [[가야]], [[왜국]]의 군사와 함께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. 이에 광개토대왕은 구원을 위해 보병과 기병 도합 50,000명의 대군을 편성하여 신라에 보냈는데, 남거성(男居城)[* 오늘날의 [[경기도]] [[여주시]] 일대로 비정된다.]에서부터 백제-가야-왜 연합군을 몰아내며 [[서라벌]]에 다다르니 왜군이 가득하였다고 한다. 고구려군이 도착하자 연합군은 퇴각하였고,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[[금관국|임나가라]]의 종발성(從拔城)까지 이르니 왜군이 곧 크게 무너져 항복하였다. 이후 전황은 글자 훼손으로 인해 잘 파악되지 않지만, 대체적으로 잔존하던 연합군 세력을 마저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는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호우명 그릇.png|width=100%]]}}}|| || {{{#000,#fff {{{-1 경주 호우총 출토 그릇. [[광개토대왕]](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)의 이름이 적혀 있다.}}}}}} || 이전까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[[내물 마립간]]이 직접 고구려를 방문하여 조공했을 정도로 고구려는 신라의 국가적 위기를 타파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, 이후 [[고구려]]는 [[눌지 마립간]] 이전까지 수십 년 간 [[신라]]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. 전쟁으로부터 2년 후인 402년 2월 내물 마립간이 사망하자, 당시 [[눌지 마립간|눌지]], [[김복호|복호]], [[미사흔]] 등 수많은 계승 후보가 있었음에도 1년 전 신라로 귀국한 친고구려계 인사 [[실성 마립간]]이 왕위를 차지하였다. 당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증거로는 [[광개토대왕]]의 왕호가 새겨진 〈[[호우총|호우명 그릇]]〉이 있다. 아울러 이 전쟁을 계기로 [[근초고왕]] 시기에 이룩되었던 [[백제]]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패권은 거의 완전히 소멸하였으며, [[가야]] 및 [[왜국|왜]]와의 연합 또한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. 그동안 [[가야]] 내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[[김해]]의 [[금관국]]은 큰 타격을 받아 주도권을 상실한 채 532년 멸망할 때까지 작은 성읍 국가로 전락하였고, [[반파국]]에게 맹주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. 이후에도 백제는 403년 7월에 [[신라]]의 변경을 공격하기도 했으며, 이듬해인 404년에는 왜, 가야와 함께 또다시 고구려의 [[대방군|대방]](帶方) 땅(오늘날의 [[황해도]] 지역)을 공격하였다. 이번에는 [[수군]]과 [[육군]]으로 황해도의 석성(石城)을 짓밟은 후 [[평양성]]까지 이르는 등 나름대로 선전하였으나, 이윽고 연합군의 길을 막은 뒤 좌우로 공격을 개시한 [[광개토대왕]]의 군대에 의해 다시금 궤멸하고 만다. 〈[[광개토대왕릉비]]〉에 따르면 참살된 왜구가 무수히 많았다고 하니 피해가 상당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